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죽음을 생각한다. 삶에 자신이 없어질 때,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이 될 때 누구나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쉽게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은 없다. 삶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크게 다가오는 탓이다.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죽음은 늘 우리의 곁에 가까이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의사와는 별반 상관없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아무리 죽기 싫다고 버틴들 죽음의 사자가 오는 길을 막을 수는 없다. 그 옛날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진시황제도 불로장생을
염원했지만 그 역시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죽음은 우리에게 보다 더 가까운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이 발전되면 될수록 오히려 죽음의 기회도 훨씬 더 많아지게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날로 늘어만 가는 자동차는 수많은 인명사고를 동반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은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지만 순식간에 다가오는 이러한
죽음들은 인간에게 외마디 비명을 지를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가능성, 이 예측불허의 죽음의 가능성
속에서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가 절실하기만 하다. 그렇게 죽음은 하늘에서도, 땅 위에서도, 물 위에서도, 땅 밑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공간 속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와같이 죽음으로 유명을 달리한 그 넋들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이며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로서 그 영혼들을 위하여 베풀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도리는 무엇일까?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땅에 묻히거나, 재가 되어 수중
혹은 공중으로 흩어지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맹수들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육신은 그렇게 떠나가지만 영혼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원불교에서는 그
곳을 중음계라고 이름한다. 완전한 하늘나라도 아니고 인간세상도 아닌 영혼이 잠깐 머무는 어둠의 집인 것이다. 지극히 착하지도, 지극히 악하지도
않은 보통 인간의 영혼은 이 중음계에서 약 49일을 체류하며 새 몸을 받을 준비를 하여 적당한 곳으로 가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만
주고 몹쓸 짓을 밥먹듯이 저지른 악당이거나 평생에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은 혹은 더 빨리, 혹은 더 더디게 몸을 받기도
한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좋은 자리에, 그리고 사람에게서 몸을 받지 못하고 다른 동물의 세계에 마음이 끌려가 그 곳에서
몸을 받는 수가 있다. 이는 평소 지어놓은 업과 집착 때문에 보는 눈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좋은 곳은 추해 보이고 피해야 할 곳은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일종의 환각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환각을 깨뜨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도록 인도하는 의식이 바로 천도재이다.
천도재는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집착을 놓고 올바로 보고 좋은 곳에 몸을 받도록 당부하는 의식이다. 여기서는 재주가 열반인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해야 하며, 의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합해져야 천도가 잘 이루어진다. 또한 천도 법문이나 종소리로 잃어가는 정신을 흔들어
깨워주고 바로 보고 바로 오도록 당부해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의 둘째 아들이 어린 나이로 죽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에게
종을 떼어오라 하여 한참동안 종을 치고 경을 외웠다. 그리고 그 까닭을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아이가 제 어미하고
둘이서만 오랫동안 살아와서 정도 많이 든 데다가 저렇게 어린나이로 떠나가려 하니 발이 떨어질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혼이 멀리 자유롭게
뜨지 못하고 제 어미에게 딱 달라붙어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어서 착심을 떼라고 종을 울린 것이네. 영혼이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에는 쇳소리가
제일이지. 만약 저 영혼이 멀리 뜨지 못하고 이 집안에 붙어 있다가 사람으로 몸 받을 기연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필시 이 집에 강아지나 쥐로도
태어날 수가 있지. 제 어미는 그 아이가 온 줄도 모르고 옆에 오면 빗자루를 들고서 붸아낼테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원불교의
천도재는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혀 낯설거나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그 진행과정이 자연스럽고 정제되어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또한 죽은
사람을 일컫는 '영가'라는 말은 영혼에 대한 극존칭의 대명사에 해당하므로 '○○○ 영가시여!'라고 불러주면 영가들은 기분이 매우 좋아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같이 원불교식의 천도재에 영가의 이름으로 불려나가는 영혼들을 다른 영혼들은 몹시 부러워한단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이런 천도재가 위력이 있기로 정평이 나있다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원불교식 천도재에서는 영가에게 다그치거나 잘못을 질책하거나 겁을 주어
떼어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던가. 어렸을 때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러 놓았는데 어른들이 앞뒤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나무라기만 한다거나 자기 인격을 너무 무시한다고 여겨지면 잘못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같이 대들거나 오히려 더 큰 말썽을 저질러서 더
화를 돋구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잘못한 것을 덮어주고 조용히 이유를 들어주면 잘하라고 하지 않아도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이 스스로 서지곤
했던 기억이 다들 조금씩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영가가 무슨 이유로든 몸을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것은 누구보다 영가
자신에게 가장 괴로운 일일 것이므로 그의 세정을 알아서 어루만지며 달래주고 진정으로 영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올바른 정신을 차릴 것을 당부하면
영가 스스로 모든 집착을 놓고 천도에 정성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천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착심이요 그 다음이 지어놓은
업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사람의 영식이 이 육신을 떠날 때에 처음에는 그 착심을 좇아가게 되고 후에는 그 업을 따라 받게 되어
한없는 세상에 길이 윤회하나니 윤회를 자유하는 방법은 착심을 여의고 업을 초월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천도는 죽어서만 하는 것도
아니요 죽은 자에게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므로 생전에 자기 천도를 자기가 할 수 있다. 평생에 선업 짓기에 노력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삶에 대한 애착을 훌훌 놓아버리는 연습을 늘 해야 한다. 가족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재산에 대해,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해
또는 지극히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 모든 집착을 놓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은 단지 변화일 뿐이요 영원히 없어지지도 영원히
있는 것만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저 해가 비록 서천에 진다 할지라도 내일 다시 동천에 솟아오르는 것과 같이 만물이 이
생에 비록 죽어간다 할지라도 죽을 때에 떠나는 그 영식이 다시 이 세상에 새 몸을 받아 나타나게 된다."는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에 의지하여,
항상 오늘 죽어도 여한 없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워질까!
반야의언덕/진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