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거사는 한숨을 나직이 쉬었다.
일요일 아침이었고, 아내가 손 없는 날이라 해서 잡은 날인데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 많은 걸 여기 다 실어요?"
박거사는 이슬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워물었다.
타이탄 운전기사는 짐을 실을 때부터 부어 터진 목소리였다.
운전기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신혼생활 3년째, 서로 총각처녀 때부터 끼고 살던
것들을 합쳐 내다 버리기는 아깝고 갖고 다니기는 구차한 허섭쓰레기들, 그래도
인간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버티고 살아오는 데 도움을 주던 살림살이들이었다.
운전기사가 미간을 찌푸릴 때 부르르 화를 내려는 박거사를 제치고 눈치 빠른
아내가 눈웃음치며 이삿짐 센터와 전화로 계약한 돈 외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운전기사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며 속닥거리자 운전기사가 난색을 폈던 것이다.
"어떻게 해요?"
어쨌든 결혼한 지 삼 년만에 세 번째 집을 옮기는 장롱이며 이불보따리들을 다 꾸려
놓고 땀과 비에 젖은 채 담배연기를 허공에 날리고 있는 박거사에게 아내가 울상을
지었다.
"일이 참 고약하게 됐어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박거사는 앞이 캄캄했다. 낙엽은 하나 둘 떨어지고
근처에 절이 있는지 목탁 소리가 처량맞게 들려왔다.
"여자가 집구석에서 뭐하는 거냐? 이사하기 전에 두 번 세 번 전화로 확인을
해 봐야 될 거 아냐?"
"세상에 이런 일이......"
박거사의 아내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골목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하리만큼 가는 이삿짐과 오는 이삿짐으로 너저분했는데
타이탄 트럭이 뒷걸음질로 골목을 빠져나가려다 좁은 골목을 들어오려는 승용차
하나와 데모대와 진압군처럼 대치하고, 서로 클랙슨을 누르고 있었다. '바싹 골목
귀퉁이에 붙이면 빠져 나올 수 있잖아요'하며 신경질을 부리자 기분이 상해 버린
운전기사가 구시렁대더니 기어코 시비가 붙어 멱살잡이로까지 번진 것이다.
"허참, 남의 일로만 알았는데....."
차가 빠져 나가느니 못 빠져 나가느니의 싸움은 둘째 치고, 박거사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 글쎄 돈을 빼 줘야 하잖아요. 여기서 돈을 받아야 저희도 이사할 집으로 가
잔금을 치를 거 아녜요. 아침에 은행문 열면 돈을 해 준다던 영감님이 글쎄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더니 함흥차사인 거예요. 이건 내 참 속이 타서....."
속이 타는 건 박거사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갈 방에 살던 사람들도 역시 비는 철철 오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이었다.
"글쎄, 그쪽 집도 이사를 하기로 하고 날짜를 잡았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이....."
비는 점점 더 흉폭해지고 있었다.
박거사는 급히 지물포를 물어 물어 비닐을 사다가 이불이며 닳아빠진 장롱,
그리고 책가지들을 덮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래,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고 보자. 빈 창자가 꼬르르 거리는구나."
박거사는 망연자실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 있는 아내의 팔을 끌었다. 아내는
비에 젖는 이삿짐을 바라보고 '망할놈의 주인집 영감'하며 울먹울먹하다 기어코
울음보를 터뜨리는 거였다.
"자, 가아. 남들 보기 민망하다."
박거사의 팔에 끌려 그렇게 깨끗하지 않은 중국집 2층에 자리잡고 앉은
아내는 '기막혀라, 정말 말도 안돼'하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미안해. 다 내가 못난 탓이야."
"그렇죠, 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개 팔자라고 주인 잘 만나면 맨날 뼈다귀를
뜯고 소고기국물을 먹는데 주인 잘못 만나면 맨날 못났다고 두들겨 맞기나 하고
종국에는 보신탕으로 잡아먹히고....."
중국집을 나오며 아내는 고시랑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박거사는 그렇게 쏘아붙이는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세 살던 집에서 아들이 제대를 한다고 방을 비우라던 건 벌써 두 달 전이다.
아내는 일요일만 되면 박거사를 이끌고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순례를 다녔다.
보름 전에야 겨우 전세보증금이 맞는 방이 나서 어렵사리 계약을 했던 것이다.
아내의 기대는 대단했다. 비록 방은 한 칸이지만 목욕탕, 주방, 두 평 남짓한
거실까지 있는 집이 천오백만 원의 전세라면 거저라는 것이다.
아내에게서 이상한 기미를 발견한 건 오래 전이었다. 아내는 매사에 즐거운지
늘상 콧노래를 불러대는 거였다.
"이봐, 뭐 좋은 일 있어?"
"이렇게나마 굶어 죽지 않고 사는 게 즐겁죠, 뭐."
"뭐라구?"
박거사는 어이가 없어 풀석 웃었다. 그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 중요한
서류를 집에 두고 왔다는 걸 알고 집에 전화를 했을 때 전화는 벨만 울릴 뿐이었다.
박거사는 애가 끓었다. 결국 박거사는 택시를 집어 타고 다시 집으로 내달려야만
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 안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방문을 잠그고 집을 나서며 웬지
착잡한 심정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날 박거사는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와서
아침에 집에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걸 표시하지 않고 아내를 떠 보았다.
"이봐, 나 출근하면 당신은 뭐해?"
"뭐하긴 집안 청소하고 빨래하고. 가정주부의 일이 보통일인지 알아요?"
박거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박거사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박거사보다 한 수 위였다. 이부자리를 깔고 드러누울 때까지 박거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착잡했다. 아내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가, 아니면 바람을 피우는 것인가.
"아까 아침에 집에 왔다 갔대매요?"
아내의 말에 박거사는 벼랑에 서 있는데 누가 와락 떠미는 것만 같았다.
"나, 요아래 공장의 식당에 취직했어요. 아침 여덟 시 반에 출근해서 한 시
반에 끝나요. 벌써 보름 됐어요."
"나한테 허락도 없이 그래도 되는 거야? 내가 밥을 굶겼어, 옷을 발가벗겨
놓고 살게 했어?"
"왜 이래요, 소리는 지르고? 창피하게."
아내는 당장 때려 치우라는 박거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비록 전문대 출신이지만
영양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 월급도, 대학강사로 지식을 보따리에 쌓아 내다 파는
자신과 큰 차이가 없다는 거였다. 박거사는 협박도 해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았지만
아내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렇게 아내가 박거사의 저금과 자신이 일 년을 뛰어서 모은 돈으로
전세보증금을 배로 늘린 것이다.
그러나 이사는 하지 못했다. 장롱이며 이불, 자질구레한 것들은 골목의 한
귀퉁이에서 비닐에 덮인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여관으로 가자."
아내는 여관으로 따라 들어오며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박거사와 아내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여관방에 들어섰을 때 비는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하는데."
"그래. 경매에 붙여질 집이라던가, 집주인이 사기꾼은 아닌 것 같던데 뭐."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고 박거사는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 올렸다.
아내는 말이 없는 박거사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소주병과 오징어 그리고
종이컵이 든 비닐봉투를 조용히 밀었다.
박거사는 비상경계령 속에 꿈틀거리는 안개처럼 윗몸을 일으키고 소주병을 이빨로
땄다. 그리고는 잔에다 투명한 소주를 따를 것도 없이 병모가지 채 입에 대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박거사는 불결하다며 여관방에 들어서서 이불과 베개를 펼 생각도 않고
앉았던 아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 유난떨지 마. 다아 사람 사는 일이야."
"그래도 전 싫어요."
금세 술기운이 온몸으로 돌았다. 빗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어 왔다. 빗소리보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알지 못할 남녀의 신음소리가 벽을 뚫고 들어와 여간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여보, 나 사랑해요?"
"-----"
"할 말이 있어요. 나 아이 가졌어요."
박거사는 도리질치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아내는 박거사 가슴속에서 한 마리 작은
새처럼 파닥거렸다. 그때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영감님."
박거사를 떠밀고 발딱 일어서서 문을 열던 아내가 반색을 했다.
"죄송합니다, 이거."
집주인 영감님이었다. 온몸은 비에 흠씬 젖어 있었고 초췌한 모습으로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토해냈다.
"아저씨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죄송합니다. 아침에 아들놈이 영업용 택시를 모는데 그만 봉천동 고개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치어 다리를 분질렀다지 뭐예요. 그런데 차에 치인 게
어린애라서...... 지금이라도 집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반장이거든요.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짐을 방으로 다 옮겨 놓았어요."
"그럼 방에 들어 있던 사람은 이사를 가고요?"
"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박거사는 머리가 띵해져오며 잠시 아뜩해진 눈을
감고 벽을 짚고 섰다 눈을 떴다.
영감의 뒤를 따라가던 박거사가 임신한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골목 속으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어둠이 한 걸음 한 걸음씩 물러서는 걸 볼 수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었고, 아내가 손 없는 날이라 해서 잡은 날인데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 많은 걸 여기 다 실어요?"
박거사는 이슬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워물었다.
타이탄 운전기사는 짐을 실을 때부터 부어 터진 목소리였다.
운전기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신혼생활 3년째, 서로 총각처녀 때부터 끼고 살던
것들을 합쳐 내다 버리기는 아깝고 갖고 다니기는 구차한 허섭쓰레기들, 그래도
인간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버티고 살아오는 데 도움을 주던 살림살이들이었다.
운전기사가 미간을 찌푸릴 때 부르르 화를 내려는 박거사를 제치고 눈치 빠른
아내가 눈웃음치며 이삿짐 센터와 전화로 계약한 돈 외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운전기사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 주며 속닥거리자 운전기사가 난색을 폈던 것이다.
"어떻게 해요?"
어쨌든 결혼한 지 삼 년만에 세 번째 집을 옮기는 장롱이며 이불보따리들을 다 꾸려
놓고 땀과 비에 젖은 채 담배연기를 허공에 날리고 있는 박거사에게 아내가 울상을
지었다.
"일이 참 고약하게 됐어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박거사는 앞이 캄캄했다. 낙엽은 하나 둘 떨어지고
근처에 절이 있는지 목탁 소리가 처량맞게 들려왔다.
"여자가 집구석에서 뭐하는 거냐? 이사하기 전에 두 번 세 번 전화로 확인을
해 봐야 될 거 아냐?"
"세상에 이런 일이......"
박거사의 아내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골목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하리만큼 가는 이삿짐과 오는 이삿짐으로 너저분했는데
타이탄 트럭이 뒷걸음질로 골목을 빠져나가려다 좁은 골목을 들어오려는 승용차
하나와 데모대와 진압군처럼 대치하고, 서로 클랙슨을 누르고 있었다. '바싹 골목
귀퉁이에 붙이면 빠져 나올 수 있잖아요'하며 신경질을 부리자 기분이 상해 버린
운전기사가 구시렁대더니 기어코 시비가 붙어 멱살잡이로까지 번진 것이다.
"허참, 남의 일로만 알았는데....."
차가 빠져 나가느니 못 빠져 나가느니의 싸움은 둘째 치고, 박거사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 글쎄 돈을 빼 줘야 하잖아요. 여기서 돈을 받아야 저희도 이사할 집으로 가
잔금을 치를 거 아녜요. 아침에 은행문 열면 돈을 해 준다던 영감님이 글쎄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더니 함흥차사인 거예요. 이건 내 참 속이 타서....."
속이 타는 건 박거사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갈 방에 살던 사람들도 역시 비는 철철 오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이었다.
"글쎄, 그쪽 집도 이사를 하기로 하고 날짜를 잡았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이....."
비는 점점 더 흉폭해지고 있었다.
박거사는 급히 지물포를 물어 물어 비닐을 사다가 이불이며 닳아빠진 장롱,
그리고 책가지들을 덮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래,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고 보자. 빈 창자가 꼬르르 거리는구나."
박거사는 망연자실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 있는 아내의 팔을 끌었다. 아내는
비에 젖는 이삿짐을 바라보고 '망할놈의 주인집 영감'하며 울먹울먹하다 기어코
울음보를 터뜨리는 거였다.
"자, 가아. 남들 보기 민망하다."
박거사의 팔에 끌려 그렇게 깨끗하지 않은 중국집 2층에 자리잡고 앉은
아내는 '기막혀라, 정말 말도 안돼'하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미안해. 다 내가 못난 탓이야."
"그렇죠, 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개 팔자라고 주인 잘 만나면 맨날 뼈다귀를
뜯고 소고기국물을 먹는데 주인 잘못 만나면 맨날 못났다고 두들겨 맞기나 하고
종국에는 보신탕으로 잡아먹히고....."
중국집을 나오며 아내는 고시랑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박거사는 그렇게 쏘아붙이는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세 살던 집에서 아들이 제대를 한다고 방을 비우라던 건 벌써 두 달 전이다.
아내는 일요일만 되면 박거사를 이끌고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순례를 다녔다.
보름 전에야 겨우 전세보증금이 맞는 방이 나서 어렵사리 계약을 했던 것이다.
아내의 기대는 대단했다. 비록 방은 한 칸이지만 목욕탕, 주방, 두 평 남짓한
거실까지 있는 집이 천오백만 원의 전세라면 거저라는 것이다.
아내에게서 이상한 기미를 발견한 건 오래 전이었다. 아내는 매사에 즐거운지
늘상 콧노래를 불러대는 거였다.
"이봐, 뭐 좋은 일 있어?"
"이렇게나마 굶어 죽지 않고 사는 게 즐겁죠, 뭐."
"뭐라구?"
박거사는 어이가 없어 풀석 웃었다. 그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 중요한
서류를 집에 두고 왔다는 걸 알고 집에 전화를 했을 때 전화는 벨만 울릴 뿐이었다.
박거사는 애가 끓었다. 결국 박거사는 택시를 집어 타고 다시 집으로 내달려야만
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 안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방문을 잠그고 집을 나서며 웬지
착잡한 심정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날 박거사는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와서
아침에 집에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걸 표시하지 않고 아내를 떠 보았다.
"이봐, 나 출근하면 당신은 뭐해?"
"뭐하긴 집안 청소하고 빨래하고. 가정주부의 일이 보통일인지 알아요?"
박거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나 박거사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박거사보다 한 수 위였다. 이부자리를 깔고 드러누울 때까지 박거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착잡했다. 아내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가, 아니면 바람을 피우는 것인가.
"아까 아침에 집에 왔다 갔대매요?"
아내의 말에 박거사는 벼랑에 서 있는데 누가 와락 떠미는 것만 같았다.
"나, 요아래 공장의 식당에 취직했어요. 아침 여덟 시 반에 출근해서 한 시
반에 끝나요. 벌써 보름 됐어요."
"나한테 허락도 없이 그래도 되는 거야? 내가 밥을 굶겼어, 옷을 발가벗겨
놓고 살게 했어?"
"왜 이래요, 소리는 지르고? 창피하게."
아내는 당장 때려 치우라는 박거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비록 전문대 출신이지만
영양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 월급도, 대학강사로 지식을 보따리에 쌓아 내다 파는
자신과 큰 차이가 없다는 거였다. 박거사는 협박도 해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았지만
아내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렇게 아내가 박거사의 저금과 자신이 일 년을 뛰어서 모은 돈으로
전세보증금을 배로 늘린 것이다.
그러나 이사는 하지 못했다. 장롱이며 이불, 자질구레한 것들은 골목의 한
귀퉁이에서 비닐에 덮인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여관으로 가자."
아내는 여관으로 따라 들어오며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박거사와 아내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여관방에 들어섰을 때 비는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하는데."
"그래. 경매에 붙여질 집이라던가, 집주인이 사기꾼은 아닌 것 같던데 뭐."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고 박거사는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 올렸다.
아내는 말이 없는 박거사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소주병과 오징어 그리고
종이컵이 든 비닐봉투를 조용히 밀었다.
박거사는 비상경계령 속에 꿈틀거리는 안개처럼 윗몸을 일으키고 소주병을 이빨로
땄다. 그리고는 잔에다 투명한 소주를 따를 것도 없이 병모가지 채 입에 대고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박거사는 불결하다며 여관방에 들어서서 이불과 베개를 펼 생각도 않고
앉았던 아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 유난떨지 마. 다아 사람 사는 일이야."
"그래도 전 싫어요."
금세 술기운이 온몸으로 돌았다. 빗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어 왔다. 빗소리보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알지 못할 남녀의 신음소리가 벽을 뚫고 들어와 여간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여보, 나 사랑해요?"
"-----"
"할 말이 있어요. 나 아이 가졌어요."
박거사는 도리질치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아내는 박거사 가슴속에서 한 마리 작은
새처럼 파닥거렸다. 그때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영감님."
박거사를 떠밀고 발딱 일어서서 문을 열던 아내가 반색을 했다.
"죄송합니다, 이거."
집주인 영감님이었다. 온몸은 비에 흠씬 젖어 있었고 초췌한 모습으로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토해냈다.
"아저씨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죄송합니다. 아침에 아들놈이 영업용 택시를 모는데 그만 봉천동 고개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치어 다리를 분질렀다지 뭐예요. 그런데 차에 치인 게
어린애라서...... 지금이라도 집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반장이거든요.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짐을 방으로 다 옮겨 놓았어요."
"그럼 방에 들어 있던 사람은 이사를 가고요?"
"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박거사는 머리가 띵해져오며 잠시 아뜩해진 눈을
감고 벽을 짚고 섰다 눈을 떴다.
영감의 뒤를 따라가던 박거사가 임신한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골목 속으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어둠이 한 걸음 한 걸음씩 물러서는 걸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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