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엄마,
이들은 필연적이며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지고한 사랑이 이들 관계에서 생성된다.
그리고 불멸의 사랑을 이들이 써 낸다.
이들 사이는 불목이 있을 수 없고, 떼어놓을 결별도 있을 수 없고, 다만 회자정리만 있을 뿐이다.
회자정리는 가슴 아픈 별리로 불가결한 천리의 법칙이므로 거스를 수 없는 섭리에 우리는 어찌할 도리없이 순응한다.
자연에의 인간 순응은 순수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은 순응을 부른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는 순응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 된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메마른 땅이고, 황무지이고, 각박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나만 있다는 것이고 이웃은 없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일까?
아침 저녁으로 타는 버스에서 등교하는 학생들과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는데 도대체 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공중도덕이 없다는데에 학생들에 대한, 학교 교육에 대한 회의를 느끼곤 한다.
남을 생각하는 배려는 전혀 없고, 공중 시설내에서의 도덕은 아예 찾아 볼 수 없다. 더욱 학생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안타까움이 있다.
어느날 버스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정오를 넘어가는 토요일 버스 안이었다.
버스 안은 이미 하교 후 학원으로 가거나 집으로 가는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버스 안은 여느때나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양 귀에 리시버를 꽂고 음악을 듣는 학생이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학생, 문자를 보내는 학생, 뒤쪽으로는 여학생 한패들이 몰려 앉아 떠는 수다는 버스 안이라기 보다 그 애들의 수다방으로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주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어 안내방송은 아예 들을 수도 없
는 불난 호떡집에 큰 소리가 났다.
“야, 이눔들아! 조용히 좀 못해? 저 할머니가 니들 떠드는 소리에 안내방송을 듣지 못해 내릴 곳을 지나쳤잖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의 호통이었다.
수다 떨던 학생들이 찔끔했다. 순간 버스 안이 조용했다.
어르신은 자리를 고쳐 앉으시며 “ 요즘 학교에서는 차안에서 수다떠는 공부만 가르치나? 원 참!” 하시는 중얼거림에 학생들이 일제히 와- 하고 웃어댔다.
어르신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소리치셨다.
“어른이 말하는데 뭐가 우스워, 이눔들아! ”
“우리 학교에서는 수다 떠는 것도 가르치고 방정떠는 것도 가르쳐요 할아버지.”
어느 학생의 말대꾸였다.
“뭐야?” 어르신은 노발대발 하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어느 놈이 말대꾸 했어? 어느 놈이야?” 사지를 후들거리시며 눈을 부라렸다.
“됐어요 할아버지, 얌전히 갈께요.” 등을 돌리고 서있는 학생이 반 돌아보며 못마땅하게 내뱉는 말은 가시가 있었다.
“야, 학생. 됐어요 가 뭐야, 됐어요 가. 할아버지 같으신 어르신께 그게 무슨 말투야? 그냥 잘못했습니다 하지.”
한 아저씨가 학생을 힐난했다.
학생은 아저씨를 돌아보며 “우리들은 버스 안에서 말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우리들에게도 말할 권리가 있는데 왜들 그러세요?” 야무진 반론이었다.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다 학생의 야무진 시선이 마주치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꼬리 내리며 “말할 권리를 막은 것이 아니고...” 듣다 못한 어르신이 돌아보며 소리 치셨다.
“니들 떠드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거야 이눔들아!”
“할아버지 떠드는 소리가 더 시끄러운데요?”
학생들이 와-하고 웃었다. 상대를 능멸하는 웃음이었다.
“뭐야? 떠드는 소리?” 어르신이 다시 벌떡 일어나셨다.
버스가 갑자기 정차하더니 운전기사가 학생들 앞으로 왔다.
“야, 니들 다 내려. 니들같은 놈들 못 태우고 가. 어서 내려!”
“우리 내릴려면 아직 더 가야 돼요.”
“안돼! 내려서 다른 버스 타고 가!” 하면서 학생들의 팔을 잡아 끌었다.
학생들은 끌려 내리면서 “고발할 거예요. 여학생들에게 성폭행했다고.” “성폭행?” “그래요, 우리들 팔목을 강제로 잡고 끌었잖아요” “개소리말고 어서 내려 이새끼들아!” “성폭행, 언어폭행으로 고발할거야, 이새끼야!”
아이들은 무서웠다. 떠나는 버스를 향해 장지를 세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이것이 요즘 학생들의 환경이다. 무섭고 살벌한 환경이다.
아버지를 고발하는 자식, 선생님의 뺨을 때리는 학생, 공부하다말고 경찰서로 달려가 선생님을 고발하는 학생.
학생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권익만을 주장하는 학생들에게는 불이익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간섭받는 것을 싫어한다.
남에 대한 배려는 없다. 자신만이 편하고 무엇이든 자신만이 만끽하면 된다.
이것은 포식자의 근성이다. 먹이사슬 세계에서의 약육강식 근성으로 사회규범을 깨는 범죄형이다.
인성없는 사회는 평화도 없고 사랑도 없다. 이웃도 있을 리 없고 친구도 있을 리 없다. 그저 무관심과 내가 필요로 하는 대상들만 있을 뿐 인 것이다.
책을 보는 학생이나, 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들을 본지 오래다.
하얀 뭉개구름이 피어오르는 창공을 보며 청운의 꿈을 꾸는 학생들을 만나본지도 오래다. 학생다운 학생을 본지가 언제일까.
그저 늘 일상적으로 만나는 학생들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등하교하는 학생들과 휴대폰 문자와 키득거리는 학생, 이어폰을 귀에 꽂아 누가 뭐라해도 모르는 그런 학생들, 공중도덕이 뭔지도 모르고 자신만을 고집하는 학생, 남은 남이다라고만 생각하는 학생, 사랑할 수 없는 학생들이 요즘 아이들이다.
어떤 때는 아이들이 혐오스러울 때가 있다. 기막힌 현실이다.
일본 마츠나가 노부후미 작가는 “ 큰소리내지 않고 키우는 강한 아들 교육법”에서 ‘학원을 맹신하는 부모는 아이를 망친다’고 했다.
그리고 ‘학원을 너무 많이 다니면 무책임한 사람이 된다’고 요즘의 부모들을 훈시하면서 ‘명문대 환상에 있는 부모는 줏대없는 아이를 만든다’고 했다.
요즘의 아이들이 순수성을 잃고 각박하게 변질되어가는 것은 자라는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모두가 부모의 허황된 생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끌고 가려는 부모들의 독선에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인생의 피해자, 사회의 피해자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엄격히 따지면 부모는 아이들의 가해자이고, 아이들은 요즘 부모들의 피해자인 것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가해자는 피해자를 서로의 정도를 모르고 학교에 보내고 학교에 가는 모순된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일탈할 수 있을까?
‘이어폰을 달고 사는 아이는 공부를 못한다.’
‘주입식 학습은 건전한 호기심을 망친다’
‘목적없이 공부하는 아이는 권위주의자가 된다’
‘부모는 아름다움을 찾을 줄 아는 아이로 키워라’
‘사과할 줄 아는 엄마는 아이들을 멋지게 키운다’
‘리더로 키우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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